치료자 예수님: 친구 관계
1. 친구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
(마 9:1-8, 막 2:1-12, 눅 5:17-26)
ㄱ.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예루살렘과 유대와 갈릴리 각 촌에서 찾아 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고,
사람이 많아 문 밖에 까지 꽉 찼다.
ㄴ. 이 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와서 지붕의 기와를 벗기고 예수님 앞으로 그 병자를 달아 내리었다.
ㄷ.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 하시고 병도 고쳐 주시었다.
2. 본문에서 찾아 보는 교훈
ㄱ. 예수님이 사역하신 고을은 가버나움이라는 갈릴리 바다 북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표현되고 있다
(마 9:1).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신 후 (눅 4:16-31),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서 사시며 사역을 많이 하셨는데 (마
4:13),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였다
(마 4:14-16, 사 9:1-2).
·
‘가버나움’이란 말은 ‘나훔
(short for 느헤미야)의 마을 (Kfar Nahum)’이란 뜻이다.
·
‘나훔’이란 말의 어원은 ‘나함’이라는 말인데, 본 뜻은 ‘숨을 크게 쉬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동사로는 ‘한탄하시다’,
‘뜻을 돌이키시다’, ’후회하시다’
(be grieved, relent, repent)라는 말로 난역이 되었고
(창 6:6, 출 32:14, 삼상 15:11), 사람에게 적용되는 동사로는 ‘위로하다’,
‘안위하다’ (comfort, be compassionate) (사 40:1, 시
23:4)라고 번역되어 있다.
·
이 중 특히 사 40:1 의 말씀은 메시야가 오셔서 자기 백성을 위로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그렇게 오신 예수님이 바로 ‘위로의 마을’ 가버나움에서 사역하신 것이었다.
ㄴ. 예수님은 왜 “안심하라,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고, 그 후에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나?
·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모든 병과 고통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n 참고:
요 9:1-2 – 나면서 소경된 자를 보고, 제자들은 그가 소경된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물었다.
n 궁극적으로 사람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병과 고통으로 괴로와 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와 더불어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다
(사 53:4-5). 그리고 천국에서는 다시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나 사망이 없을 것이다 (계
21:4).
n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누가 병을 얻거나 해를 당하거나 하는 것이 그런 것을 당하지 않는 자보다 죄가 더 많아서가 아니고
(눅 13:1-5), 오히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요 9:3), 또는 예수님을 믿게 하려고 (요 11:15,42) 병이 주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
본문의 중풍병자도 자기 병으로 인한 죄책감이 있었을 것이다.
n 그런 죄책감 같은 마음의 중압감을 가지고는 몸의 병이 낫기도 어렵다.
n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의 병을 먼저 고치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은 이미 이뤄지고 있었다.
n 그리고,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명하실 때, 그 병자는 예수님 말씀대로 일어나 나갈 수 있었다.
·
바리새인과 교법사들도 그 사람의 병은 무슨 중한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n 그런데,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며 충격적이고 도전적인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 밖에는 죄사함의 권세가 없는데 (사
43:25).
n 그리고는
(율법사들이 죄 때문에 생겼다고 믿는) 병을 고치심으로, 예수님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셨다.
ㄷ.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데려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 주셨다.
·
사람이 구원받고 멸망받는 것은 각자 자기의 죄가 해결되었는가로 결정된다
(렘 31:29-30, 겔 18:1-32).
·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중보기도해야 하고 (딤전 2:1), 또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하셨다 (약 5:15-16).
·
역사상으로, 주위의 사람의 기도로 회개하고 주님에게로 돌아 온 사람의 예는 많이 있었다. 예: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로 어거스틴은
33세에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3. 올바른 친구는?
ㄱ.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여기시고 하나님의 비밀을 알리셨다
(요 15:15). 친구는 복음의 소식을 나눈다 (고넬료의 예: 행
10:24).
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데
(딤전 2:5), 친구는 친구를 위해 변백하여야 한다 (욥
16:20-21) – 하나님께 중보기도함 (딤전
2:1).
ㄷ. 친구는 충성된 권고와 통책을 하여 (회개하도록) 마음에 찔림을 줄 수 있다 (잠
27:6,9). 그러나 정죄나 이간의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잠 16:28, 17:9). 그래서 친구는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칼가는 도구와도 같다
(잠 27:17).
ㄹ. 친구는 친구의 슬픔(시
35:14)과 기쁨을 같이 한다 (롬 12:15)
·
입다의 딸과 슬픔을 나누며 두 달을 애곡한 친구들 (삿
11:37-38).
·
좋은 친구는 친구의 위급한 때에 돌아보고(잠
17:17, 27:10) 그의 필요를 공급한다
(참: 행 27:3)
·
친구와 나누는 기쁨의 가장 큰 것은 예수님을 만난 것이고
(요 3:29), 잃었던 자를 찾은 것이다 (눅 15:6,9)
ㅁ. 가장 큰 친구의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이라도 내어 놓는 것인데
(요 15:13),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위해 가장 큰 친구의 사랑을 베푸셨다
(롬 5:7-8).
·
요나단의 다윗을 위한 사랑 (삼상 18:1-3, 20:17-42)
4. 누구에게 내가 친구인가?
ㄱ.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눅
10:25-37)
·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었으나, 예수님은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즉, “누가 이웃이 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었다.
·
마찬가지로, 내가 누구에게 친구가 될 수 있는가의 질문이 누가 내게 친구의 사랑을 베풀 수 있는가 하는 것보다 더 적당한 질문이다. 당대에 천대받던 세리나 이방인들보다 승한 사랑을 베풀라고 가르치신다 (마
5:46-47) – 원수에게도 친구의 사랑을 베풀어서 (벧전 3:9, 롬 12:17).
하나님은 모세와 (출
33:11) 아브라함을 (사 41:8, 약 2:23)을 친구라 부르셨고,
예수님은 그 제자들(우리 포함)을 친구라 부르셨는데
(요 15:15), 또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 칭함 받으심을 마다 않으셨고
(마 11:19),
불평하는 자 (마
20:13), 예복이 없어서 쫓겨 날 자 (마
22:12-13), 심지어 멸망의 자식 가룟 유다에게 까지
(마 26:49-50) 친구라 불러 주시었다. 돌아 오지 않을 죄인까지 오래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ㄴ. 어떻게 친구를 만드는가?
·
물론 첫째는 복음의 진리, 예수님을 나누는 것이다
(요 15:15, 행 10:24)
·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내게 맡기신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라고 하신다
(눅 16:9). 재물로 친구를 만들기가 수월하게 해 놓으셨기 때문이 아닐까? (잠
19:4,6, 14:20).
·
그러나, 세상의 풍습을 따르는 세상의 친구가 되지 말고, 세상 사람이 나와 같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약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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