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서신을 마치면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 자기를 도와 쓸 것을 보내 준 일들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다른 교회들은 돕지 않던 상황에서도,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역의 시초에도 도왔고
(:15),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도 도왔으며
(:16), 이제 다시 로마의 옥중에 있을 때에 에바브로디도 편에 선물을 보내왔다 (:10,14,18).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생각에, 마음에 늘 있어서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이다 (:10) (여기서 ‘생각’이란 말은 φρονέω (phroneo) 란 말로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여러 차례 (1:7, 2:2,5, 3:15, 4:2,10) 사용한 말이다.
관심과 성향이 누구, 또는 무엇을 향하여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ㄴ.
빌립보 교회의 연보에 대하여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귀감이 되는 일이라고 자랑한 바 있다
(고후 8:1-5). 빌립보 교회의 바치는 생활은
* 환난과 극빈 중에도 기쁨으로 풍성하게 하였고
(고후 8:2) – 마치 사르밧 과부가 기름과 밀가루 그릇이 거반 동이 났을 때, 마지막 남은 것으로 엘리야에게 대접했듯이
(왕상 17:10-16)
* 힘에 지나도록 하였고
(고후 8:3) – 마치 예수님에게 칭찬들은 한 가난한 과부가 자기의 전 재산이 두 렙돈을 헌금하였듯이
(막 12:41-44)
* 스스로 자원하여 하였으며
(고후 8:4-5) – 인색함이나 억지로 함이 아니고 즐겨 바친 것이었다 (고후 9:7)
* 헌금 뿐 아니라 먼저 자신들을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고후 8:5) – 그래서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게 헌금만 전달한 것이 아니고, 직접 로마의 옥중에서 바울을 섬긴 것이었다
(빌 2:25-30).
ㄷ.
빌립보 교회의 섬김의 결과
* 옥에 갇힌 바울에게 위로가 되고 큰 기쁨이 되었다 (:10). 바울이 기뻐한 것은 자기가 선물을 받은 것에 있지 않았고,
그 선물이 빌립보 교회가 상을 받을 열매가 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18)
* 그 섬김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었다 (:18, 히 13:16)
+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으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 된다 하셨다 (마 25:40,45, 10:40-42).
+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고 (잠 19:17), 하나님의 일군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되어
(:18), 반드시 하늘나라의 상이 있을 것이다
(마 10:41-42).
+ 17절 후반절의
KJV 번역은 “I desire fruit that may abound to
your account.”이다. 여기서 account 란 말은 원어에 λόγος (logos) 즉 말씀이란 말로 예수님께서 비슷한 뜻으로 마 12:36, 18:23, 눅 16:2 에 쓰셨다. 즉, 이 말은 이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올바른 섬김의 생활은 우리의 삶 중에서 우리가 부끄럽지 않게 이야기드릴 수 있는 (what we can give an account
of) 것이 될 것이라는 말인 듯 싶다.
* 빌립보 교회가 섬김을 했다고 해서 더 궁핍해 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풍성하게 그들의 쓸 것을 공급해 주신다 했다 (:19).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하게 공급하셔서, 우리가 섬기는 일을 더욱 풍성하게 하기를 원하신다 (고후 9:8). 우리의 풍성함은 우리가 우리를 위해 많이 축적하려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학 1:6), 전대나 주머니가 없어도 주님이 공급하시면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눅 22:35).
2. 자족함을 배움 (:11-13) – 시편 23편의 기자는 여호와께서 자기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다 (시 23:1). 마찬가지로,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궁핍과 풍부에 처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다.
ㄱ.
궁핍에 처하는 비결
·
바울이 ‘자족’이라 쓴 말은αυταρκηα (autarkeia, self-sufficient)인데 이 말은 당대에 행 18:17절에도 나오는 스도이고 학자들이 쓰던 말이었다.
스도이고 학자들은 궁핍에 자족하기 위해서는 모든 욕구를 제거하고, 감성과 정서를
배제하여야 한다고 하는 금욕주의를 주장하였다. “The Stoics and the Early Roman Empire” 의 저자인 T R Glover 는 말하기를 “The Stoics made of
the heart a desert, and called it a peace.” (스도구아인들은 마음을 사막으로 만들고
그것을 평화라고 불렀다) 라고 했다. 그것은 진정한 자족이 아니었다.
·
그리스도인도 궁핍한 상황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만족할 수 있는 이유는 금욕을 통한 것이 아니다.
·
첫째, 그리스도인은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어야 하는 필요가 있는 연약한 인생이라는 것을 이미 아시고,
들의 백합화나 공중의 새들보다 우리를 귀하게 여기셔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신다는 신뢰함에서 오는 만족을 갖는다
(마 6:25-32, 시 145:16).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인도하시면서 만나를 먹이셔서 주리지 않게 하시고,
그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그 발이 부릍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산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 만족이다 (신 8:3-4, 2:7, 시 105:40). 하나님은 메마른 곳에서도 우리로 만족하도록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사 58:11).
·
둘째, 궁핍한 중에도 자족하는 것은, 세상의 풍부함에 만족함을 두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심령으로 (마 6:33), 하나님 당신으로 만족함을 배울 때 가능하다 (시 17:5, 65:4, 73:25, 90:14).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함을 배워야 한다
(히 13:5, 딤전 6:6-8).
ㄴ.
풍부에 처하는 비결
·
세상의 사람들이 풍부할 때에 만족하는 것은 그 쌓아 놓은 것으로 자신의 장래가 예비되었다고 착각하는 데에 있고 (눅 12:16-21), 그 쌓여진 것이 마치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이루어진 것인양 교만해 하는 데에 있다 (단 4:29-30). 풍부함 그 자체에서 만족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만족을 얻을 수가 없다 (전 5:10).
·
풍부할 때에 참 만족을 얻으려면,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존귀를 올려야 한다 (단 4:34-37, 고후 3:5).
·
그리고, 눅 12:16-21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같이 되지 말고,
영혼과 생명의 일을 생각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게 되기를 구하여야 한다.
·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려면,
눅 16:1-13에 나오는 말씀처럼,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는 일을 하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없는 자(잠 19:17, 마 19:21/막 10:21/눅 18:22), 또는 주의 일을 하는 자를 도와야 한다 (마 10:40-42, 25:40).
·
그리고, 참 복은,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풍요로움과 더불어 그것을 누리게 하시는 복을 받는 것이다
(전 2:24, 5:19, 6:2, 슥 8:12, 요 16:33, 딤전 6:17).
3. 마지막 인사말 (:21-23) – 바울은 매 서신에 그랬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하는 말로 빌립보서를 마치고 있다.
은혜와 평안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고,
그것으로 성도들 간에 문안함은 관심과 사랑의 기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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