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필법은 chiastic structure 를 사용하는데, 그 내용이 A-B-C-C-B-A 식으로 한 번 말하였던 내용을 반대 순서로 다시 말하는 필법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전체적인 내용이 chiastic structure 를 사용하여 로마 à 갈릴리 à 유대 à 예루살렘 à 예루살렘 à유대 à 사마리아 à 땅끝 의 순서로 쓰여졌다.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은 1장의 머리말에서 chiastic structure 를 사용하였다.
1.
예수님의 신성
ㄱ. “태초에 말씀(ὁ λόγος)이 계시니라”
(:1)
n 이 구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 로 시작하는 창 1:1을 상기시키고 있다. 창 1:1의 “하나님”의 자리에 요 1:1에서는 “말씀”이 있다.
n 요 1:1의 “태초에” (Ἐν ἀρχῃ) 라는 말씀은 창 1:1의 창조의 시작을 가리키는 “태초에”라는 말보다 더 이전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말씀이라 일컫는 성자 하나님의 전재성 (Pre-existence)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님은 “창세 전에” 아버지 하나님과 같은 영화를 가지셨다 (요 17:5).
ㄴ.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2)
n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요 10:30) 그 본체 (Hypostasis, ὑπόστασις)의 형상이시다 (히 1:3).
n 또한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하나님과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n 이 구절에 삼위일체의 사상이 담겨 있다.
n 태초에 이미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므로, 창조되신 것이 아니다.
ㄷ.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3)
n 말씀 하나님이 곧 창조주이시고, 창조물이 아니다.
n 말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가 예외가 없이 창조되었다 (히 1:2, 롬 11:36).
모든 창조물이 예외가 없이 말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므로, 말씀 하나님은 창조물이 아니다.
n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님을 창조물 중 첫째라고 하고, 신격화되었다고 하여, 삼위일체를 부인한다. 비슷하게 잘못된 말을 하는 사람 중에 Servetus 라는 사람이 16세기에 있어서, 말씀 하나님은 창조의 제일 초반에 존재하시기 시작하였다고 했다. 요 1:1-3의 말씀이 이들의 잘못됨을 나타내고 있다. 말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시작이 없으시게 항상 계신 분이시다.
ㄹ.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4)
n 말씀 하나님은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창조물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지탱하시는 분이시다. 히브리서 기자도 증거하기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히 1:3)라고 하였다.
n 그의 붙드시는 (sustaining) 능력이 아니라면, 만물은 당장에 썩어 없어져 버릴 것이다.
n 사도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증거하였듯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존재할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서 기동한다 (행 17:28).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로 우리가 존재하고, 하나님의 붙드시는 역사로, 우리가 살아서 기동한다.
2.
말씀 하나님의 자연 계시 (:4-5)
ㄱ.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4).
n 말씀 하나님은 그 창조의 역사와 붙드시는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계시다.
n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지고 있다 (롬 1:20).
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5)
n 하나님의 자연 계시로 인해 사람들은 어렴풋이 나마 빛의 비추임을 입게 되었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사람들에게 있다 (롬 1:19, 행 17:27)
n 이 자연 계시의 증거는 두 가지인데
· 사람에게 종교성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모습이 있으나, 단지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져서 참 하나님 대신 피조물의 형상을 우상 삼아 경배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롬 1:21-23)
· 선과 악을 분별하는 양심이 어느 정도 남아 있어, 마음에서 송사하거나 변명하는 법의 역할을 하고 있다 (롬 2:14-15).
ㄷ.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5)
n 자연 계시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을 사람들은 올바로이 깨닫지 못했다.
n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 13:13, 사 6:9)
n 요 9장의 바리새인들이 자기 죄로 인해 바로 자신들 앞에서 역사하신 예수님에 대해 소경이었던 것처럼 (요 9: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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