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도의 기쁨 (2): 복음의 진보를 기뻐함
(:12-19) –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기가 감옥생활을 하는 것을 슬퍼할 빌립보 교인들에게, 오히려 자기의 매임은 복음의 진보를 가져 왔으므로 자기는 기뻐한다고 했다.
ㄱ.
시위대 안에서 복음 전파 (:13)
·
여기서 시위대 (πραιτώρωον, 프라이토리온)는 궁중에서 황제를 지키는 근위대를 가리킨다. 시위대는 BC 27년 가이사 아구스도에 의해 시작된 뒤, 그 영향력이 점차 커져서,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즈음에는 시위대에서 지지하거나 지명한 사람이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바울이 로마에 끌려 갔을 때 죄인으로 시위대에 넘겨지게 되었다 (행 28:17).
·
그 뒤 바울은 “쇠사슬” (행 28:20, 엡 6:20)에 매인 바 되었는데, 이 쇠사슬 (αλυσις, 할루시스)은 짧은 쇠사슬로 한 병사와 죄수가 같이 묶여 있는 쇠사슬이었다 (행 28:16). 병사는 순번마다 교대하므로, 자연히 바울은 여러 병사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가 생긴 것 같다. 또한 병사들을 통하여 궁중 안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13, 4:22).
·
이와 같이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갖혔을 때에도 그 감옥의 간수와 그 식구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었고 (행 16:23-34), 요셉도 감옥에 갖혔을 때 그 전옥에게 은혜를 입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심이 드러났고
(창 39:20-23), 다니엘도 사자굴에 던지움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었다
(단 6:16-27)
ㄴ.
또한 바울의 매임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
(:14).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고,
다른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순전치 못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15-17).
·
성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하여 매임이 되고 핍박을 받는 것은,
핍박을 받는 사람에게도 기쁨이 되는 일이고 (행 5:41, 마 5:11-12), 또한 그것을 보는 다른 성도들에게도 권면이 되는 일이다
(:14).
·
사도 바울은 변질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절대로 기뻐하지 않았다
(갈 1:6-10). 그렇다면, 여기서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한 사람들도 그 전한 내용은 올바른 내용을 전했을 것이다. 내용은 올바랐으나, 그 동기는 순전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올바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 중에도 순전하지 않은 마음으로 전하는 사람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인의 악행도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시는데 쓰실 수 있다 (창 50:20).
·
어떠한 동기로 전하였건 간에, 그리스도가 전해지면 바울은 기쁜 것이었다.
ㄷ.
그리스도가 전파되어 잃었던 영혼이 돌아오게 되는 것은, 이 땅에서도 기쁜 일이고, 하늘에서도 기쁨이 되는 것이다 (눅 15:7,10,32).
ㄹ.
또한 바울로 그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는데
(:19), 여기서 구원(σωτηρία,
소테리아)이란 말은 구원에 관계된 모든 유익한 것으로 이해가 된다.
롬 8:28 말씀과 같이 감옥에 매임도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게 하는 데에 필요한 것은 중보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이다
(:19).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여러 교회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할 것을 부탁하였다
(고후 1:11, 엡 6:19, 롬 15:30-32, 살전 5:25, 살후 3:1-2, 몬 1:22).
2. 생사를 초월한 삶
(:20-26)
ㄱ.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21) – 바울에게 있어서 그 삶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었다.
·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고후 5:17), 복음의 훼방자가 변하여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었다 (딤전 1:12-13).
·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죽는 자이었다
(롬 14:7-8).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사는 삶이었다 (:20). Charles John Ellicott 이란 주석가는 해석하기를 바울이 20절에서 말하는 것은 “My body will be the theatre in which Christ’s glory is
displayed.”이라 했다.
·
그의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었고 (갈 2:20),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며 (골 1:24, 벧전 4:13), 또한 장래에 그의 영광에도 참예할 것을 바라보는 삶이었다
(롬 6:3-5,8).
·
삶의 가치관이 온전히 바뀌어, 그리스도 외의 모든 것은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다 (빌 3:7-8). 그리스도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로와 진 삶이었다 (골 3:10).
·
주 예수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하고 (히 12:2), 그가 주실 상을 바라보며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삶이었다
(딤후 4:7-8).
·
한마디로 말해서, 그의 삶의 어디를 보아도 그리스도의 향기/냄새가 나는 사람이었다 (고후 2:15).
ㄴ.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1).
·
위와 같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 사람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 (:21).
·
바울에게 있어서 죽는다는 것은 “떠나는” (αναλύω, 아날루오) 것인데, 이 말은 텐트/장막에서 로프를 풀고 말뚝을 빼어 걷어치운다거나, 정박했던 배가 로프를 풀고 닻을 올리고 출항한다는 뜻이 있다. 베드로도 자신의 죽음을 육신의 장막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벧후 1:13-14).
·
죽는 것이 유익함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고 (고전 15:51-52, 살전 4:14-17),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23, 눅 23:43).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죽는 것이 더 좋겠다고 했다 (:23). (참고: 칼빈의 강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고
(마 28:20),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나 (엡 3:17), 이 거하심은 단지 소망 가운데 즐길 뿐이고, 아직 육체에 거하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고후 5:6). 육신의 장막에서 벗어날 때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
(:23).)
ㄷ.
죽는 것도 유익하나 사는 것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함이다 (:24-26).
·
바울은 그의 사는 것을 24절에서는 επιμένω (에피메노, stay on)이란 말로, 25절에서는 μένω
και συμπαραμένω (메노 카이 숨파라메노,
abide and continue)이란 말을 써서,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는 준비를 하고 대기해 있는 거함을 가리켜 이야기했다.
·
개인적으로는 죽는 것이 더 좋겠으나 (:23), 살고 죽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대로,
그의 백성에게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 되는 편으로 있기를 원했다.
3.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생활을 하라 (:27-30) – 여기서 ‘생활하라
(πολιτεύομαι, 폴리튜오마이, behave as a citizen)’란 말은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하라는 말인데,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빌 3:20), 그 시민권에 합당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
ㄱ.
천국시민으로서 첫째 의무는,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다 (:27).
·
한 마음이라 함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의 일치를 말하는데, 다시 말해서 믿음의 내용의 일치를 가리킨다.
성도들은 한 하나님, 한 그리스도,
한 성령을 믿는 같은 믿음을 가졌다 (엡 4:4-6).
·
한 뜻이라 함은 의지적인 단합을 말한다.
성도의 뜻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옵기를 바라는 것이므로 (마 6:10),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맞추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일 것이다
(암 3:3).
·
이와 같이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지고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복음의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롬 16:3,9,21, 고전 3:9, 고후 8:23, 빌 4:3, 몬 1:1,24).
ㄴ.
천국시민으로서 둘째 의무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딤후 2:2) 대적하는 자, 곧 사단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28). 환난을 받으며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대장 예수께서 이미 이기셨기 때문이다
(요 16:33).
·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이 (엡 2:8),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29).
·
고난을 받음으로 또는 고행을 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하나의 빙거/증거이다 (:28, 살후 1:4-5).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은 복이다 (마 5:10-12).
·
동시에, 성도를 핍박하는 것은 핍박하는 그들에게 멸망의 빙거이다 (:28, 살후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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