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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February 27, 2016

히브리서 5장 11절 ~ 6장 20절


1.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내용 (6:1-2) –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의 초기에 배워 익혀야 하는 것들로 잊어서는 되나, 그렇다고 거기에 머물러서 성장함이 없어도 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집을 짓는 데에 터에 해당하는 것들인데 (6:2), 집을 지을 계속 터만 닦아서는 집이 지어지는 것과 같다. 여기에 열거된 사항들은 아마도 당시에 초신자에게 교리 문답할 교회의 장로나 감독이 물었던 것들이었을 것이다. (현대의 세례받기 전에 당회에서 학습 문답하듯이.)

(1)  죽은 행실을 회개함 믿기 전에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여 우리를 죽게 했던 것들( 2:1-3) 부터 회개한 , 믿고 처음으로 회개를 가리킨다. 일단 믿은 후에는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졌으므로 ( 5:24) 이상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다고는 없다 (요일 5:16-17). (광범위한 뜻에서 회개는 믿음의 생활에서 계속되어야 하는 새로운 (regeneration) 포함한다고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2)  하나님께 대한 신앙 ( 1:17, 2:4)

(3)  세례들 어른이 되어 받는 세례와 유아세례. 유아세례를 받은 자는 성인이 입교하면서 안수를 받았다.

(4)  안수 안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한다는 표이었다 ( 48:14, 27:18, 34:9). 예수님도 어린 아이들에게 안수하시고 축복하셨고 ( 19:13-15, 10:16) 병자들에게 안수하시고 낫게 하셨다 ( 6:5, 8:23,25, 4:40, 13:13). 초대 교회에서도 안수하였다 ( 6:6, 8:17, 9:17, 13:3, 19:6, 딤전 4:14, 딤후 1:6)

(5)  죽은 자의 부활

(6)  영원한 심판

2.     믿음의 초보에 머무르는 자와 장성한 자의 비교 (5:11-14, 6:7)

(1)  듣는 것이 둔함 vs.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음 (5:11,14)

ㄱ.  여기서 지각이란 말은 αισθητηριον (aistheterion, 아이스데테리온, perception, 깨달음)이란 말로 13:13, 6:9-10 말씀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ㄴ.  장성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것은 사용하여 결실하는 자이다 (5:14, 6:7, 13:23). 이런 결실은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적당하게 은혜의 단비를 내리셔서 (6:7, 2:23, 26:4, 11:14, 28:12, 5:9-10, 55:10-11, 5:24, 6:3, 10:1) 허락하시면 (6:3) 가능하다. (이른 비는 가을 10월경에 내리는 비로 moreh 라고 하며 씨앗이 싹이 나게 하는 비요, 늦은 비는 3월경에 내리는 비로 malqosh 라고 하며 추수 전에 내려 곡식이 열리게 하는 비이다. 말씀의 씨가 싹이 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 이시고, 싹이 자라나서 결실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고전 3:7).)

ㄷ.   반면, 신앙의 초보자는 듣는 것이 둔하다고 했는데, 여기서 둔하다 말은 νωθρος (nothros, 노쓰로스)로서  둔한’(dull, stupid) 또는 게으른’ (lazy, slothful) ( 6:12절에서 처럼)으로 번역될 있다. 대조하여서, 13:15이나 28:27 듣기에 둔하다 말은 βαρεως (bareos, 바레오스)로서 어려웁게’ (with difficulty) 말이다. νωθρος (nothros, 노쓰로스) 말은 신앙의 초보자로 남아 있는 자가 믿음의 성장을 위해 부지런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2)  vs. 단단한 식물 (5:12-13)

ㄱ.  고전 14:20 나온 것처럼, 성도는 악에 대하여는 어린아이처럼 순결하여야 하나, 지혜에 대하여는 어린아이처럼 어리석어서는 된다 (: 10:16)

ㄴ.  본문에서 말하는 젖은 지혜에 어린아이와 같아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적인 것만 감당하는 것을 뜻한다. 고전 3:1~2에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나 아직 육신에 속하고 신령하지 못한 자들이 겨우 감당하는 것을 젖으로 표현하였다.

ㄷ.  단단한 식물은 고전 2:6, 4:13, 1:28 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 또는 장성한 자가 감당하는 그리스도의 도의 깊은 경지라고 하겠다. 이런 자는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는다 ( 4:14). 하나님의 진리에 확고히 있는 자이다. 우리는 이렇게 믿음에 장성한 자로 자라가야 한다.

3.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배도하는 (6:4-6,8)

(1)  13:24-30,36-43 나오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처럼,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유형교회 안에 신자와 가짜가 섞여 있다.

(2)  13:1-23 (또는 4:1-20) 나오는 뿌리는 비유에서 처럼 궁극적으로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말씀이 전해지기도 하고, 그들도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 또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있을 , 넘어지고 결실하지 못한다. (: 딤후 3:6-7). 단지 죄로 인해 저주의 소산인 ( 3:17-18) 가시와 엉겅퀴를 뿐이다 (6:8)

(3)  본문에서도, 결국 버림받는 자들도, 잠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맛볼 있음을 말하고 있다.

ㄱ.  마지막 날에 주님께 내침을 받을 자들 중에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 7:21-23). 끝까지 믿음을 지키어 열매을 맺지 못한 자들이다 ( 7:15-20).

ㄴ.  실제로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포함한 12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고, 이스라엘 사방으로 복음을 전하게 파견하셨다 ( 10:1-8).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도적으로 ( 12:6), 재리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멸망의 자식으로 드러났다 ( 17:12).

ㄷ.  이렇게 유형교회 안에 있다가 타락/배교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본래 교회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일 2:18). 이런 자들은 마치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박는 것과 같아 다시 사죄함받을 없다 ( 6:6, 10:26-29).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 ( 12:31, 3:29).

(4)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녀들은 위와 같이 아주 타락하는 법이 없다 ( 22:32, 6:39-40, 10:28-29, 17:2,6,11-12, 8:33-39, 11:29, 1:3-14, 1:6, 살전 5:23, 살후 3:3, 벧전 1:4-5, 요일 3:9). 그러나 배교하는 자들을 거울과 경계로 삼아 (고전 10:10) 우리도 넘어질 조심하되 (고전 10:11), 하나님께서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지키실 것도 신뢰할 것이다 (고전 10:12).  마찬가지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되 ( 2:12),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루도록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 2:13).

ㄱ.  히브리서 기자도 히브리서 독자들이 배도하는 자들이 아닌 것을 알고 권면하고 있다 (6:9).

ㄴ.  히브리서 독자들의 행위(6:10) 그들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 행위였다 ( 2:13).

ㄷ.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이 있었는데 (6:10), 성도들을 섬긴 것이 하나님을 섬긴 것이 되는 것이다 (: 25:40, 19:17, 10:40-42).

ㄹ.  또한, 히브리서 독자들은 성도를 섬기는 사랑의 수고를 하되, 번하고 그치지 않고 계속 하였다 (6:10).

ㅁ.  이런 사랑의 수고는 이들이 구원받을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었는데, 그들에게는 오래 견디어 내는 소망이 박약하였으므로, 점에 대해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에 부지런하였듯이,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에도 부지런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6:11).

4.     장성한 자의 믿음과 소망 (6:11-20).

(1)  믿음과 소망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6:11).

ㄱ.  믿음과 사랑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랑을 나타내었는데 (6:10), 믿음이 없다면 이런 사랑을 없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믿지 못한다면, 용서하심도 모를 것이고, 용서하심을 모르면 사랑을 베풀 줄도 모를 것이다 (요일 4:16,19). 많이 용서함 받은 자가 (다시 말해서, 많이 용서함 받았음을 깨달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하셨다 ( 7:36-50).

ㄴ.  믿음과 소망
·      믿음과 소망은 항상 병행한다 ( 11:1). 믿음으로 하나님이 진실하시고 그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알고 믿는다면, 소망으로 진실하신대로 약속이 성취되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소망의 근거이고, 소망은 믿음을 계속 키우고 지탱하는 것이다. 소망은 영혼의 같아서 (6:19), 의심의 파도에 이리 저리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 1:6).
·      하나님의 약속이 때로는 더딘 같으나, 믿음과 소망으로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6:11, 2:3, 8:17). 주께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심같이 ( 90:4, 벧후 3:8-9). 참된 믿음에는 오래 참음이 있다.
·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모두 하나님 안에 있다 (벧전 1:21).

ㄷ.  끝까지” “오래 참음으로믿음을 지키어 소망의 풍성함/확실함(assurance) 이를 것을 권면하고 있다 (6:11-12).

(2)  소망의 확실함 (full assurance, πληροφορια, plerophoria, ‘(약속을) 완전하게 수행함(fully carrying (out))’이란 뜻이다)

ㄱ.  하나님은 12:2-3, 13:14-17, 15:4-5, 17:2,4-8, 22:16-18 여러차례에 걸쳐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번성케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특별히 22:16-18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시며 약속을 굳건하게 하셨다.

ㄴ.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한 것은, 첫째로,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없는 진실하신 분으로서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이고 (6:18, 23:19, 12:6), 둘째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시어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6:13-17).

참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함
·       하나님은 사람들이 맹세의 권위를 얻고자 이름으로 맹세하는 맹세의 보증인이시다. 그렇다면, 이가 없으신 하나님으로서는 하나님 자신으로 밖에는 맹세하실 수가 없다 (6:13).
·       우리도 맹세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하신다 ( 6:13, 10:20). 다른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 하신다 ( 23:7).
·       단지 맹세하는 일에 거짓으로 하면 되고 ( 19:12), 그러므로 머리털 하나도 임의로 희고 검게 하는 인생으로서 함부러 맹세하지 것이다 ( 5:33-37). 하나님은 맹세의 보증인이시기도 하시지만, 거짓 맹세를 벌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ㄷ.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여, 아브라함은 오래 참고 믿는 중에 자기 생전에는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나 ( 11:13), 약속을 받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 6:15).

ㄹ.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 개인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요, 그의 모든 자손들,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이다 (6:17).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믿는 자들이 받는 것이다 ( 3:16-22, 4:16-24). 그러므로, 같은 약속을 받은 우리도 ( 2:38-39, 3:25) 아브라함을 본받아 (6:12), 완전하게 수행될 소망을 확실히 믿고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받아야 한다.

ㅁ.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외의 모든 세상 것들을 버리고 그런 것으로 부터 피하여 가는 우리 앞에 놓여진, 가까운데 있는 것이다 (6:18, 10:6-8, 30:12-14).

(3)  소망의 내용 (6:18-19)

ㄱ.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일년에 휘장 안에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이 새겨진 호마노 개를 에봇의 견대에 붙였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이 새겨진 보석을 흉패에 붙인 에봇을 입고 지성소에 들어감으로 ( 28:1-43), 자신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여 지성소에 들어감을 나타내었다.

ㄴ.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셨는데, 혼자만 들어가신 것이 아니고 우리 앞서 들어가셔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6:20). 우리도 하늘의 지성소 (, 하나님 계신 존전) 예수님의 뒤를 따라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ㄷ.  소망이 우리 영혼의 닻과 같아서, 세상의 풍랑 가운데서도 우리를 튼튼하고 견고하게 지키는 것이다 (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