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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September 25, 2010

수요 예배 간증문

제게는 무슨 획기적인 기적 같은 것을 간증할 것은 없으나, 어떻게 보면 제 생애 전체가 기적의 연속이어 왔습니다. 제가 특별히 감사해 하는 것은, 신앙이 좋으신 부모님에게 태어나서 신앙 안에서 양육 받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는 부모님 밑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자라났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젊으셨을 때에는 무역을 크게 하시어 당시 평양에서 손 꼽히는 무역상이셨지만, 6.25동란 중 피난 나오시고 30대 후반에 소명을 받으시고 목회의 길을 걷게 되셨습니다. 목사님이 되신 후에는 정말로 전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시며 충성되이 섬기셨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때에는 모든 교인들의 이름을 불러 가시며 기도하셨는데, 한 번은 밤새 폭설이 내려 교회가기가 어렵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물론 일찍 일어나셔서 강변길을 걸어 교회를 가셨는데, 새벽기도를 다녀오시자, 저희 외할머니가 오늘은 눈이 이렇게 많이 왔는데, 참석한 사람이 있었는가고 물으셨습니다. 아버님이 '예'라고 답하시자, 외할머님은 놀라시며 도대체 누가 왔었느냐고 되 물으셨습니다. 아버님은 대답하시기를, 예수님이 같이 기도하는 중에 계셨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저희 아버님이 40대 중반에 얻은 장남이었는데, 저희 아버님은 목회자로서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묵상하고 전하는 일에 전념하여야 하는데, 내 아기라고 너무 오래 안아 주고 시간을 보내기는 주님께 송구하다고 하시며 저를 안아주는 것도 가끔 잠깐 뿐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5학년 때, 저희 아버님은 소천하셨고, 제가 장례식에서 들은 말씀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저희 아버님은 진짜 목사님이셨다고 친지분들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희 어머님은 일찍 부터 간호사로서 사회 생활을 하신 분이십니다. 1950년대 이미 미국에 교환교수 자격으로 미네소타대학을 두 번이나 다녀 가셨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잘 추수리시기 위해 목사님이신 아버님과 결혼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님이 직장생활을 하시는 동안, 저는 집에서, 저희 외할머님과 이모님을 통해 성경말씀을 배우며 자라났습니다. 매일 모든 가족이 가족예배를 항상 드렸고, 할머님이나 이모님은 때가 있을 때마다 제게 성경이야기를 하여 주셨습니다. 제 미국 이름을 디모데 라고 한 이유 중의 하나도, 성경의 디모데가 로이스와 유니게에게서 신앙으로 양육받은 것처럼, 제게도 저희 외할머님, 이모님, 그리고 어머님의 신앙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조상의 신앙을 조금이나마 배운 관계로, 저는 어려서 부터, 하나님께서 제 아버지시라는 것과 예수님이 내 구주시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자랐습니다. 동생들과 얘기할 때에, 우리는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부자라 하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제가 어려서 자랄 때에, 제가 3 학년까지도 우리 동네 전체에 텔레비젼도 하나 없었지만, 궁핍하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쯤 되어서, 저희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유신 헌법 개헌 이후 학생들의 데모가 한창일 때이었는데, 저희 어머님은 제가 데모에 휩쓸리어 허송세월하지 않고 미국에 와서 마음껏 공부하기를 원하신다 하셨습니다. 저희가 미국으로 오는 날 공항에서 환송예배를 드렸는데, 그 때 당시 서소문의 평안교회 김윤찬 목사님이 설교해 주신 말씀은 여호와 이레의 말씀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저희의 갈 길을 가셔서 길을 준비해 주실 것이고, 모든 것을 형통하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실로 저희의 이민생활은 여호와 이레의 은혜의 생활이어 왔습니다. 세 가지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처음 미국 와서 California의 Bellflower라는 곳에 잠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 곳 고등학교에 한 달 정도 다니게 되었는데, 등교 첫 날 만난 역사반의 선생님은 제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 주셨습니다. 나를 학교 끝난 뒤에 찾아 오라고 하시더니, 내게 교과서를 한 권 내어 주시며, 집에 가지고 가서 책에 한국말로 토를 달아 쓰고 공부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장로교회 교인이라는 것을 들으시고는 자기도 그렇다고 하시면서, 저희 아파트 근처의 장로교회에 저를 데리고 가셔서 그 곳 학생부 목사님에게 저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곧 그 곳 교회 장로님들이 저희 집을 심방 오셨고, 아직 차도 없는 저희 가족을 위해 주일 예배 참석할 수 있게 ride도 주선해 주셨습니다. 그 선생님은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준비해 주신 분이셨습니다.

얼마 후 저희는 Princeton 을 거쳐 New York City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New York 시를 방문한 첫 날에 저희 어머니는 직장을 구하셨는데, 바로 일하실 병원과 같은 block에 아파트도 얻었고, 또 같은 block에 제가 다닐 고등학교도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 고등학교에서 저는 Mr. Weinberger라는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 학교 과학과의 과장이셨는데, 제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시면서, 제가 학교과정 외에도 더 공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시립대학에 가서 수학이나 과학과정을 공부하도록 해주셨고, 방과 후에는 따로 만나서 저는 그 분의 보조교사 역할도 하였습니다. 이런 배려 때문에 2년 후에는 예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예일 대학 시절에는 마침 그 곳에, 저희 어머님과 친분이 있으신 전 연세대 도서관장과 학장을 지내신 한태동박사님 가족이 계셨는데, 제가 또 도움을 여러모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4년 후에는 학사와 석사를 동시에 수여하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그 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의과과정을 공부하였는데, 그 곳에서도 저희 어머님 친구 분의 동생이신 박은식 목사님 가정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여 주셔서, 제가 그 분들의 사랑을 받으며 4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제 일생을 돌아 보면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복을 누리는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특별한 재능이나 재산도 없이, 언어도 다른 이국땅에 와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감사해야 할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둘째로, 저희 부부가 결혼한 과정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의 은혜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California의 나성에 살았는데, 이미 언급한 김윤찬 목사님의 아들 김혜성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다니시던 아주 존경스러우신 권사님이 저에게 당신의 조카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몇 번 편지 왕래를 해 보았으나, 당장에 관심이 끌리지 않아, 편지를 중단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그 조카되는 사람은 겨우 대학교 1학년인지라, 하나님께서 시간을 끄시려고 편지를 중단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몇 년 뒤 제가 한국에 나가게 되었는데, 결혼할 상대도 없었으나, 무조건 반지를 준비하고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 권사님의 조카를 만났는데, 이 때는 그 아가씨는 대학을 갓 졸업한 때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말주변도 없고, 특히 여자들 앞에서 활발하지도 못 하여서, 연애도 한 번 해 본 적도 없고, 제가 아가씨의 마음을 제 능력으로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저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아가씨가 제게 "아니오"라고 할 수 없게 미리 준비를 다 해 놓고 계셨습니다. 그 아가씨는 대학 1학년 때 저와 편지를 두어번 주고 받은 적이 있었는데, 제 편지가 오기 전 날 밤에는 한번 만나지도 못한 저의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편지로 제 사진을 받아 보고는 꿈에 미리 본 사람이라 아마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한 번도 아니고, 편지 받을 때마다 그런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확정하신 것이라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본인은 아직 대학생이라 하나님께 시간을 연기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합니다. 직접 만나게 된 날, 자신이 꿈에 본 사람과 내가 너무 똑 깥아서 놀라웠다 합니다. 만나는 날, 우리 둘이는 권사님 동생, 즉 제 장인되실 분이 시무하시는 교회에 가서, 같이 기도하는 중에 제가 청혼을 하게 되었고, 아멘으로 대답을 얻고, 결국 같은 날 저녁에 약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닷새 후인 토요일에 결혼을 하였고,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전에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의 말을 듣고, 이삭과 결혼하기 위해 선듯 나섰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제 아내도 저를 만난 지 6일째 되는 날 저와 결혼을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미리 준비해 주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셋째로, 금년 4월에 저는 심장 마비가 있어서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주일 아침 준비를 하고, 교회에 오려고 하는 때에 가슴에 통증이 오고, 잠시 안정하여도 없어지지 않아, 아내가 운전하여 병원으로 갔습니다. 마침 주일이라, 응급실도 복잡하지 않았고, 저는 도착하자 마자 검사를 통하여 제가 심방 마비 증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판명이 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치 제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신속히 움직여 주었고, 저는 곧바로 Cardiac Catherterization Lab으로 옮겨 져서, 우선 급한대로 막힌 심장 혈관 세 곳을 angioplasty하여 뚫고, 또 stents를 집어 넣었습니다. 제 상황이 좋아진 며칠 뒤에 또 세 곳을 더 뚫어, 제 몸에는 지금 여섯 개의 stents가 있습니다. 또 병원에 있는 동안, 제게 research study에 참가하겠는가 하며 제 응고력에 관해 검사한 것이 있었는데, 이것 때문에 stent안에 응고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을 위해 흔히 먹는 약을 복용하지 않고, 몇 해 전에 일본에서 개발한 새 약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주일에는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성가대에도 설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입원 중 출혈을 많이 한 터라 힘이 모자라, 찬송도 힘차게 나오지 않았지만, 그냥 주일 예배에 참석도 하고 성가대에 설 수도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너무나 감사한 예배와 찬송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후로 그 전보다 더 힘있게 살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희 가족은 콜럼버스 한인 교회에 지난 여름부터 나오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도 하나님의 배려하심이라 생각합니다. 저의 가족이 이사를 여러번 나니면서, 여러 교회를 접해 보게 되었는데, 각 교회마다 특별히 잘하는 강점이 있어, 제가 배울 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콜럼버스 한인 교회는 강점이 여럿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기도에 열심하는 것이 강점이라 생각합니다. 주일 예배 중 최소 한 두 번은 전 교인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교회는 저로서는 처음이고, 심지어는 목사님 아드님 결혼식 중에 통성기도로 전 하객들이 축복하였는데 참으로 교회의 특성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었습니다. 왜 이런 것이 하나님의 배려하심이라고 생각하는 가 하면, 제 일생 사는 동안 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미리 준비해 주시고 이끄시는 것을 경험하며 사는 동안, 제가 하나님께 매달려서 애타게 간구하는 것이 너무나 없어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과 말씀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은 즐겼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나 짧아진 제 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생활을 다시 배우라고 제게 배려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통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 눈이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제 귀가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여 순종하고,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른 사람들을 세워 주고 덕을 끼치며, 제 숨은 하나님을 찬양드리는 데에 쓰이고, 제 손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며, 제 발은 평안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길로 달려가며, 제 마음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다가 조금하고 낙망하지 않고, 계속 하는 것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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